난 사실 외모를 가꾸거나 멋진 옷을 입는 것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입니다.
잘 나지도 않았지만 외양을 가꿀 만한 정성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이 살아 왔지요.
학생때도 생긴대로 지내왔고, 실용적인(?) 옷만 입고 다녔습니다.
30여년 전일이지만 빠뜻한 월급에 삼남매 학비와 서울 유학비 대기도 힘드신
아버님을 생각해서라도 알뜰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빈부 격차가 심하지 않았던 탓인지 표가 날 정도로
잘 입고 가꾸는 동기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학생들이 입고 있는 브랜드와 외모로 사람을 판단 하는 거와는 전혀 다른
시대였지요.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하면서부터는 달라져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고, 일을 하면서 부터는 외모 가꾸기(?)에도
신경 써야 하고, 옷도 깔끔하게 입어야 했습니다.
숙소에서 살아야 하고 쇼핑할 시간도 없는 전공의로서는 누군가가 챙겨주거나.
본인이 부지런하여 알아서 해야 하는데, 챙겨줄 가족은 시골에 있고,
눈썰미도 없는데다 쇼핑도 할 줄 모르니 난 문제가 있었지요.
그때만 해도 의료보험이 보편화 되어 있지도 않았고 대학 부속 병원도 많지 않아서
대학병원으로 올 정도면 아주 심각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구나 사립 병원이라 수가도 비싼편이었지요.
요즘처럼 장마비가 내리는 여름 무렵에 심한 상태의 환자가 응급실로 내원했습니다
첫눈에도 넉넉지 않은 사람들 같았지만 응급실 원무과에서 입원 수속이 안되는걸
우겨서 중환자실로 입원시키고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보험이 안되는 사람이 많아 입원시에는 약간의 보증금을 요구하던 시대였습니다.
물론 병원비 문제로 야반 도주 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그래서 원무과 직원들과 전공의 사이에서는 마찰이 가끔 있었습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아 환자는 일반 병실로 옮기고 순조롭게 회복 되어 갔습니다.
힘들었던 고비도 지나고 부부가 앉아서 식사도 같이 하는 모습을 보니 참 보기도 좋고,
치료에 동참한 의사로서 보람도 있었습니다.(대학 병원은 팀이 진료를 합니다.)
퇴원이 며칠 남지 않은 날 회진 끝나고 나오는데 보호자가 저를 면담 하고 싶어 한다는
간호사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전 일과 정리하고 시간을 내서 면담하러 병실로 갔더니 보호자가 줄자를 꺼내더니
제 바지 치수를 재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왜 이러시냐고 했더니 선생님 바지가 너무
낡아 보여서 하나 해드리고 싶으니 거절 하지 말아 달라고 하셨어요.
보호자는 요즘은 없어졌지만 청계천에서 두 분이 봉제일을 한다고 하더군요.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에도 수십 벌 만드느라 고생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조금 살만 하니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하면서 병원비는 어떻게 해결했는데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은데 마침 내 바지를 보니 하나 해드리고 싶었답니다.
자기들이 늘 하던 일이 부담 갖지 말라고 하면서 다음날 뚝딱 만들어 왔더라구요.
그때 전 좀 창피했습니다.
내가 너무 외양에 무심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학생도 아니고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의사라는 직업은 최소한 깔끔은 해서 좋은 인상을 줘야 하는데
환자들에게 너무 지저분해 보였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그 분 덕분에 사회 생활의 첫걸음을 배운거지요.
그때부터 서울 사시는 누님에게 부탁해서 셔츠도 넥타이도 다양하게 준비하고.
바지도 짙은 색깔로 여러벌 준비해서 신경 쓰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천성이 게으른 탓인지 작심 삼일이라고 나중에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병원에서 처음 받는 선물.
그러기에 더 기억 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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