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을 밟고 당신이 지나간다 젖은 영혼 위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자국을 남기며 지나간다
당신이 밟은 자리마다 나는 두 손을 감싸며
가만히 구두를 들어올린다
당신과 내가 닿았던 자리는 상처이기도 하고
각인이기도 하지만
어느 것도 오래 가는 것은 없다
옛사랑은 서로 바라볼 수 없는 사랑이다.
고개를 떨구거나 천정을 보거나 머쓱하고 웃거나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딴청을 피워야 하는 사랑이다.
옛사랑은 이윽고 내 것이 된 사랑이다.
가끔 꺼내보는 기억의 액자소설.
하지만 내 것이라고 해서 달라진 건 없다.
그저 거기에 있어야 하는 사랑이다.
액자와 현실 사이에 서늘하게 만져지는
유리의 촉감이 쓸쓸한 사랑이다.
옛사랑은 우습다.
왜냐 하면 멈춰있기 때문이다.
피가 거꾸로 솟던 분노도
미친 절망도 스틸사진처럼
고즈넉해진 사랑이다.
뜨거운 채로 냉동되어 버린 그 포즈,
피식 웃을 수 밖에 없는, 사랑의 화석같은 것이다.
옛사랑은 현실에 붙이는 부기(附記)같은 것이다.
너덜거리는 기분을 몇 장 넘겨보노라면
눈자위가 무거워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현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달콤하다.
옛사랑은 자기 자신을 훔쳐보는 행위이다.
자기 자신의 어떤 시간에 질투하며,
자기 자신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옛사랑은 자기 자신의 체온에 관한 그리움이다.
어느 때인가 치솟았던 가슴의 온도,
이마의 온도, 그리고 조울처럼 넘나들던
파도의 높이.
옛사랑은 자기에 대한 그리움이다.
옛사랑은 늘 따뜻한 시선이다.
그 등 뒤의 시선에 의지하여 걸어간다.
돌아보고 싶지만 그냥 걸어간다.
걸어갈 수록 옛사랑은 멀어지는 게 아니라
달처럼 따라온다.
때론 이마 위에서 내려 비칠 때도 있다.
옛사랑은 몇 개의 장소들이다.
몇 개의 장소가 만들어낸 몇 개의
풍경들이 붙어있는 시간의 벽이다.
풍경 속에는 늘 푸른 빛이 있고 붉은 해가 있다.
그리고 하얀 얼굴과 긴 그림자가 있다.
옛사랑은 낡은 의자 위에 앉아있는 늙은 사람이다.
실없이 가끔 웃는다.
나는 당신을 잊어버렸다.
그래야 진짜 옛사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모순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농담하지 말라고?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라고 이문세는 노래하지만, 그건 부정법이다.
그리운 것을 내 맘에 둘 순 없다.
그건 현실을 출렁거리게 하는 옛날이니까.
그리움 말고 더 편리한 감정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짓는 무표정과도 같이..
--------- 원문출처 : pednet; 비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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