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잃었던 아들’과 비까비까 아름다운 장면으로
‘엠마오로 가는 길’을 꼽고 싶다.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매운탕 장시를 함시로
하루하루 평범흐게 살아가고 있는 어부에게
하루는 범상치 않게 생긴 양반이 다가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한다.
글고는 “인자는 너희들을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흔다.
얼척없는 말인디도 왠지 권위가 있고
거절흘 수 없는 묘한 심이 있다.
게다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내 왕국은 ~~~“ 뭐라고 하는데
잘 하면 한 나라를 세워서 한탕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어차피 싹수 없는 인생, 땅땅거리며 한 세상 살아 볼라고
스승을 따른다.
스승이 자기를 따를라믄 직장도, 처자식도 버려야 흔다기에
고렇게 했다.
갖은 고생 다 흠시로도
영광의 그 날만을 기달리며 악으로 버텼다.
제자들 중 그래도 글깨나 배우고
잔머리 좀 돌리는 유다는 스승을 테스트 해 보려고
은 30 냥에 팔아 넘긴다.
당연히 스승은 기적을 베풀어서
잽해가기는 커녕 적들을 일합에 물리쳐불 줄 알었다.
따르던 스승이 힘 한 번 못 써 보고 잽혀 가는 것을 본 유다는
배신자라는 저주 보다 지 선택이 잘못된 것을 알고는
목을 메어 최대의 피해자가 된다.
딴 제자들도 설마 스승이
오찌고라도 살아 돌아올 줄 알았다.
근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부렀다.
그것도 안끗도 해 놓은 것도 없음시로
염장을 질르듯 “다 이루었다,”며 고개를 떨군다.
YS, DJ, 놈현이도 줄기차게 따라 댕기면
나중에 감방에 갈말정 몇 년 아니 몇 달이라도 누렸는데.
하늘 같이 모시던 스승이
유언비어로 대중을 선동하고
내란을 음모한 정치범으로 몰려
가장 비참한 십자가형에 처해지자
제자들의 공포와 두려움, 실망과 후회는 걷잡을 수 없었다.
모다들 지 살길 찾아 토끼기에 바뻤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목잡고
감자 심고 수수심던 두메 산골 내 고향에~“
이스라엘 지형상, 예루살렘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엠마오는 서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져있기에
아마 지중해로 지는 석양이
축 처진 어깨에 고개를 떨구고
먼지 풀풀 나는 내리막 자갈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두 제자를 비치고 있었으리라.
그 때 부활한 스승이 그림자 같이 날아들어 함께 걸으며
“먼 일로 고렇게 풀이 죽어 걷느냐고?”묻는다.
“아! 최근에 일어난 부엉이 바위,
아니 나자렛 예수 일도 몰르요?”
얼굴도 안쳐다 봄서 퉁을 놓는다.
스승은 배시시 웃으며 요것 저것을 자상흐게 갈쳐준다.
“느그들 맴은 알겄는디
어차피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겄냐?
운명이다. 아무도 원망하지 마라.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차지흘라면 그런 고난을
겪어야 흐느니라“
스승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디서 많이 들은 듯
하도 그럴 듯흐고 감동적이어서
듣다보니 동네에 도착흔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하고 간청하는 순간
스승은 연기처럼 사라져분다.
“놀랬지! 믿거나 말거나 예전에 말흔 대로
나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 왔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행여 제자들에게 충격을 줄세라
“마음의 행로”라는 영화에서 남편 기억 되살리듯
옛날 옛적 제자들과 함께 했던 추억을 되살려
스스로 느끼게 하는 스승의 자상함과 배려!
우리가 머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았을 거야.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굳게 믿고
집 나간 아들 기다리는 애비의 심정으로 기다리거나
딴 사람으로 변장해서 우리와 만나 놀았을거야.
비행기가 한 쪽 날개로만 날 수 없듯이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친구들과도 만나
생각과 이해의 폭을 넓히자꾸나.
글고 나이 묵어 갈수록 맘이 넓어지고
똥글똥글 해질 줄 알았는디 고 반대여.
도리어 째끄만 일에도 야속흐고
서운한 생각이 들고 삐지드라고.
늙은깨 꼬라지만 늘어 상처를 받는가 봐.
긍깨 될 수 있으먼 부드럽고 존 말만 흐자.
근다고 나쁜 일을 좋다거나
못된 놈을 잊어 불자는 것은 아니여.
----------- 박 용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