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오고 살아 가기

이야기V

까치산하나 2008. 7. 26. 12:06

첫경험.

사람이 태어나 자라는 과정은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배우고 성장합니다.

수많은 경험중에서도 첫경험이라는 것은 각자의 맘속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되겠지요.

오늘 이야기는 내가 의사로서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던 첫경험입니다.

 

응급실 당직 인턴은 환자가 들어 오면 신속히  진단을 하고 필요한 과에

연락을 하는 일종의 교통 정리를 잘 해야 합니다.  

4월이라 졸업한지 얼마 안되고 임상 경험이 없어 미숙하기 때문에

숟하게 야단 맞고 여기 저기 치이고 부대끼면서 배우고 경험하고

진정한 실력자로(?) 거듭 나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지요.

 

비가 오면 환자가 없다고 우리는 유비 무환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날도 봄비가 추적 추적 내리고 있어 모처럼 쉴 수 있겠다고

좋아라 하면서 일찍감치 당직실에 들어가 누웠지요.

항상 잠이 모자라는 직업이라 머리만 누이면 잘 자는데

비몽 사몽간에 누군가가  날 깨우는것 같아 일어나서 보니

아무리 인터폰을 해도 안받아 간호사가 직접 나를 깨우러 온 거였습니다.  

시간은 벌써 새벽 두시.

나가보니 비를 잔뜩 맞은 젊은 여자 한 분과 남편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와 있었습니다.

환자는 여자로 너무 두통이 심해 말을 못할 정도였고 남편은 술을 많이 먹어

대화가 안될 정도여서 난감했습니다.

두통의 정도가 너무 심하고 진찰상 신경학적인 이상이 감지 되어

신경외과 당직 선생님을 호출하여 환자 인계하고 다시 당직실에서 잤지요. 

문제는 다음날입니다.

신경외과에서 나를 부른다고 해서 또 혼나게 생겼구나 하고  풀이 죽어 갔는데

어제 환자가 검사 받다가 사망했다고 하는 겁니다.

주치의께서  어제 응급실 내원 당시의 소견을 자세히 말해 달라고 해서  진찰 기록과

초진 소견을 제출했습니다. 아마도 뇌동맥류파열인거 같다는 사인도 들었지요.

 

(참고로 뇌동맥류라는것은 일종의 혈관 기형으로 뇌동맥혈관이 꽈리 모양으로 부풀어 있다가

어느 순간에 터져서 뇌출혈로 사망하는 극히 위험한 병이지만 증상이 없기 때문에 사전에 알아내는

방법이 없습니다. CT나 MRI를 하면서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많고, 동맥류가 커지면 두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어 그때 발견 되기도 합니다. 만성  두통 있으신분들 꼭 진찰 받아보세요!! 

이 동맥류가 파열되면 심한 두통과 신경학적 이상이 나타나면서 응급 치료를 해야 합니다.

파열 되기전 발견만 되면 요즘은 치료가 많이 발달하여 예후가 좋지만 파열되면 치료도 어렵고

사망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갑자기 비보를 당한 보호자들은 황당하겠지요. 

당연히 받아 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남편되시는 분은 당시 무교동 유흥가를 주름 잡던 조폭(?)의 중간 보스라네요.

한동안 병원이 시끄러웠습니다.

나도 많이 시달렸습니다.

힘들더군요.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다들 피해 다녔습니다.

이런 상황이 참 슬펐습니다. 의사 관두고 싶기도 하고..

 

부검까지 하고 사인이 명백히 밝혀진 날 밤입니다.

간호사가 날  찾는 사람이 있다고 연락을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잠시 만나볼 사람이 있다고 나가자고 하는겁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남편이었습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맨먼저 초진을 한 의사로서 의견을 듣고 싶다는데

안나갈 수가 없었지요.  나가보니 건장한 남자들과 함께 남편이 앉아 있더군요.

동생들 하고 같이 왔다고 말하면서 동맥류의 원인이 뭔지 말해 달라고하는겁니다.

황당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지요. 이미 자세한 것은 다른 의사를 통하여 들었을텐데..

아는대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왜 이런걸 나에게 듣고 싶으냐고,

남편이 말하길 내가 너무 젊어(?) 보여 학생인줄 알았다는 겁니다. 

만약 학생이 자기 부인을 초진했다면 가만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고 하데요.

그러면서 자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인을 만난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소설 한권이었지요. 

대학 병윈은 실습 학생이 진찰하는 예가 있다고 들었다면서 혹시 학생이 진찰하면서

실수하지 않았나 의심했다고 하던군요. 

사실 실습 학생은 항상 나와 있지만 학생은 옆에서 관찰만 합니다.

환자에 관한 모든 책임은 의사에게 있지요. 

 

졸업한지 얼마 안되어 경험도 없었지만, 의사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실감한 날이었습니다.

의사는 냉철해야 하고, 실력 있어야 하고, 병을 보기전에 사람을 보라는

선배 교수님들의 말씀이 잔소리가 아니라는 걸 몸으로 배우고 ,

또 의사는 정말 고독한 직업이라는 걸 시간이 가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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