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XIV
비 오는 날의 추억
봄이 오면 봄비가 내리지요.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비가 아닌
부슬 부슬 부슬비. 이슬비..
우산을 쓰고 걷다 보면
어느새 옷이 다 젖는 봄비.
몇날 며칠을 병원에 매여 살다가
모처럼 집에 가는 날인데,
비가 온다고 숙소에서 지낼 수도 있지만
딱딱한 일상에서 벗어 나고자 하는 맘에
다음날 컨퍼런스때 발표해야 할 숙제물(?)을 들고
병원문을 나서지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혜화동 로타리에 자리 잡은 병원이라서
지척에 창경궁, 비원이라고도 했던 창덕궁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걸었습니다.
집은 멀었지만 병원에서 나서면 명륜동 성대 입구,
계속 걸으면 서울 과학관, 창경궁 정문을 지나
원남동 로타리에서 우측으로 돌담길 따라 쭉 걸으면 돈화문.
건너편에 가든 타워라는 커다란 빌딩 1층에는 당시 흔치 않던
원두커피를 내려 주던 카페가 있었습니다..
카페를 들어서면 코를 자극하던 강렬한 커피향이 참 맘에 들었습니다.
저녁 무렵이라 손님도 없고, 새하얀 테이블보가 눈부셨던 탁상에 앉아
숙제를 하고, 차를 마시며 흐르는 조용한 클래식칼 연주곡을 들으며
소란스런 분위기의 병원을 떠나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냈지요.
가끔은 거기서 편지도 썼습니다.
다들 쌍쌍이 앉아 있는데 남자 혼자서 그런 모습을 보던
직원들은 뭔 생각을 했을까요?
한 두시간 좋은 분위기에서 놀다가 집에 가면 정신없이 자고
새벽같이 출근하여 또다른 분주한 나날을 보냈지요.
며칠전에 저에게 묻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어느때냐고?
아마도 그때가 가장 좋았던 시절 같습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고,
편지 보낼 곳도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