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이야기
여강의 추억
여주 사람들은 신륵사를 지나 읍내를 가로 지르는 남한강을 여강이라고 부릅니다.
20여년전 취약지 병원으로 개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여주 병원으로의 갑작스런 발령으로
난생 처음 여주땅을 밟았습니다.
신록이 우거진 4월1일부터 근무를 해야 해서 아침 일찍 고속 버스를 타고
내린 여주 버스 터미날은 조용한 시골 그대로 였습니다.
지리를 몰라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니 멋진 강을 배후로 하얀 2층 건물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무실에 들러 짐을 정리하고 원장님께 근무 시작 보고 드리고.
직원들과 인사하고 근무를 시작했지요.
서울 병원에서의 눈코 뜰새 없이 바쁘던 기억만 있는데, 본원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의 한가한 외래와 병실을 보니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허전한듯란, 뭐가 부족한듯한, 여유를 즐기기에는 너무 바쁘게만
살아 와서 정작 한가로운 시간이 주어지니 어떻게 할 수 없었던거지요.
2층에 강이 바라다 보이는 조그만 방을 숙소로 정하고, 일과 끝나도
퇴근을 안하시고 병원에서 생활 하시는 원장님을 도와 응급 환자도 밤낮없이
봐주면서 같이 근무하시는 스텝분들과 열과성을 다하니 병원은 본원에서도
인정할 만큼 점차 안정 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5월이 되니 여주 읍내를 둘러볼 여유도 생기고 일 끝난 저녁에는 파견 나온
전공의들을 데리고 가까운 영릉으로 산책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본원에서 파견 나온 전공의들에게 여주 병원은 마치 휴가처럼 즐거운 곳이었습니다.
일도 많지 않고, 시간 여유도 많고, 일 잘하라고 원장님께서 맛있는것도 많이 사주시고,
아주 편안하고 즐거운 곳이었지요. 젊은 친구들이라 저녁에는 숙소에서 위문 공연(?)
한다고 스텝들 숙소로 초청해서 조촐한 맥주 파티도 하고, 잘 놀았습니다.
여주 읍내의 한가락 하는 조폭이 원장님 단골 환자라 전공의들이 술집에서
문제 생겨도 잘 해결 될 만큼 원장님의 신망도 두텁고 병원도 개원 2년만에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여름이 되면서 여강 강가에는 밤새 모닥불이 피워지고
노래소리가 들리는 날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농번기에 한가한 틈을 타서
자전거에 황견(?) 한마리 달아 매고 짐칸에는 커다란 가마솥을 싣고서
여강가에 자리 잡고 피로를 푸는거지요,
해가 길어지니 일 끝나고 여강가 모래 사장을 자주 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물이 깨끗하여 다슬기도 많고 물고기가 떼를 지어 노니는 걸
보는 재미와 예쁜 돌을 주워 와서 사무실에 늘어 놓고 달라는 환자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장날이면 원장님 모시고 스텝들이 국밥 먹으러 다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여주는 제밥 큰 동네라 장날이면 볼 게 많았습니다.
도시에서만 자란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지요.
여주병원에서 신망을 얻으시고 능력을 발휘 하신 원장님은 나중에 크게 출세(?)
하셨답니다.
여담이지만 산부인과 과장님께서는 요령이 좋으셔서 응급수술로 출근하실때
경찰 순찰차를 앞세우고 오시는 때가 많았는데 그분이 대단해서가 아니고
고속 도로 입구에 들어서시면 순찰대에 먼저 들리셔서 응급 수술때문에
급히 여주 병원에 가야 한다고 에스코트를 부탁하셨답니다.
정말 나는듯이 오셨지요. ㅎ
가을이 오면서 읍내에서 떨어진 병원이라 그런지 스산한 분위기가 돌았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배추값이 폭락하고, 전모씨 때문에 호주에서 소가 엄청 수입되어
소값 파동이 나서 농촌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지요.
숫송아지는 거저 가져 가라고 해도 사료값 때문에 안가져 갈 때였습니다.
배추와 무는 밭에서 갈아 엎을 만큼 폭락해서, 병원 앞 배추밭 주인은 병원 식당에 거저 가져 가라고
했지만 병원 회계상 한포기에 10원 계상하여 정산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회 분위기는 싸늘했지만 한달만에 새로 파견되어 오는 전공의들과 일끝나면
영릉과,여강 모래 사장. 신륵사에 가서 산책도 하고 매운탕도 먹고
지금 생각하면 가장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밤이면 창밖으로 보이던 하늘 가득 떠있던 별들,
논길, 밭길 따라 영릉 가는 길에 노닐던 꿩들.
왕릉 답게 웅장한 능과 꼬부라진 조선 소나무들,
깜깜한 밤에 랜턴 하나 의지하고 여강가 뚝방길을 걸어서
군청 지나 읍내 나들이하던 그때 그시절.
같이 일했던 직원들 지금은 다 뭘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