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R(퍼온글)
서울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 폐암 환자 윤모(74)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누워 있다. 그는 지난 2년간 수차례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암 세포가 온몸에 퍼진 말기 환자다. 가족만 겨우 알아볼 정도의 의식 상태인 그가 위독한 상태가 되면 그는 심폐소생술, 강심제 투여, 인공호흡기 등 일체의 생명 연장 의료 행위를 받지 않을 예정이다. 환자 가족들이 병원에 "소생술을 하지 말아달라"는 요청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윤씨 가족이 병원과 맺은 서약은 말기 환자에게 소생술을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소생술 거부', 영어로는 'Do Not Resuscitate'(DNR) 제도이다. 환자나 직계가족이 환자가 사망하기 전에 생명 연장 의료행위를 받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면, 의료진은 환자가 임종 단계에 들어갔을 때 해당 의료행위를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도록 하는 제도다. 일종의 '존엄사'(尊嚴死)다. 물론 이들은 현대의학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말기 환자들이다.
우리 사회에 이 같은 방식의 '존엄사'를 인정하는 법은 없다. 이에 대한 윤리적 논란도 있다. 하지만 국내 대학병원들은 이 같은 '소생술 거부'(DNR) 제도를 알음알음 운영하고 있다. 서울 아산병원은 지난 2001년부터 'DNR'을 문서화해서 운영하고 있다. 이후 매년 약 150~200여 명의 말기 환자들이 'DNR'을 통해 자연스런 죽음을 맞았다. 'DNR' 제도에 대해 설명을 들은 말기 환자와 가족의 약 85%가 서약에 동의했다.
'DNR'은 요즘 국가 의료기관인 국립암센터, 국립대 병원인 서울대병원, 서울시립 보라매병원, 가톨릭 종교재단이 세운 가톨릭대병원, 사립대인 연세대병원 등 상당수의 병원들이 시행하고 있다. 법적 뒷받침은 없지만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를 매일 접하는 병원들이 존엄사 차원에서 'DNR'을 도입해 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법적 규정이 없기 때문에 윤리적인 논란을 떠나 의료 분쟁의 여지를 안고 있다. 'DNR'은 우선 "의료진은 항상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해야 한다"는 현행 의료법 규정과 배치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환자에게 직접적으로 죽음의 방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기 때문에 'DNR' 서약의 약 90%는 직계가족의 결정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다(대한내과학회지·2008). 따라서 'DNR'을 인정하지 않는 환자 가족이 이를 고발하면 'DNR'에 합의한 가족과 의료진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할 수 있다. 통일된 기준이 없기 때문에 'DNR'이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남용될 우려도 있다.
'DNR'은 미국·영국 등 선진국 대부분이 법으로 인정하고 있다. 대만도 1980년대 후반 '자연사법'을 만들어 소생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들에게 'DNR'을 허용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주치의사 판단으로도 'DNR'을 결정할 수 있으며, 미국의 일부 주(州)는 환자 측에 반드시 'DNR'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도 합법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어 말기 환자들이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인공호흡기를 입에 물고 고통스런 표정을 지은 채 사랑하는 가족과 생의 마지막 이별을 해야 하는가….
------------ 조선일보 김철중 의학 전문기자 칼럼